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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길상사 다녀온 날

2016.11.26


 오전부터 눈이 쏟아졌다. 눈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계속 펑펑 내려서 오후까지도 한동안 그치질 않았다. 첫눈을 이런 식으로 맞이해서 창문을 열고는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꼭 누구한테 알려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눈이 오는 날이면 항상 밖에 나가서 어디든 좀 돌아다니고 싶어진다. 눈 내리는 날에 돌아다니면 괜히 내리는 눈들 사이에 파묻히는 느낌이라 더 포근한 느낌도 들고, 풍경도 확 달라져서 돌아다니는 게 재미있다. 근데 막상 나갈 준비를 하고 나니 눈이 다 그치고, 또 바닥에 쌓인 것도 없이 축축한 물웅덩이뿐이라 나갈지 말지 고민하다가 해질 무렵에야 집을 나섰다.


 아주 옛날에 어떤 일로 갔었고, 이후로 간간히 혼자 가는 곳이지만 길상사는 아직도 내게 새로운 곳이다. 갈 때마다 매번 새로운 느낌을 받기도 하고 그 길에서 하는 생각도 매번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내가 길상사에 갈 때마다 기대하는 것, 이런 저런 잡생각을 여미고 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여러번가서 가는 길과, 길가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 무덤덤하고 익숙하게 다가오게 될 쯤이면 길상사도 그냥 하나의 오래되고 무뎌진 경험이 될까, 그러면 거기서 느꼈던 모든 것들도 다 무뎌질까 걱정된다. 그때쯤이면 내가 더 이상 길상사에 갈 일이 없거나 아니면 다른 어딘가를 새로 찾은 것이면 좋겠다.


 산에 점점이 박혀있는 집들과 가로등 불빛들이 모두 주황색이었는데, 안개 낀 공기에까지 이 색이 번져 아예 공기의 색깔이 주황색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학교에서 광공해를 배울 때에는 이런 빛이 무조건 나쁘게 보였는데 지금은 그럭저럭 예쁘게도 보인다. 가는 길에 가로등이 무지 많은데, 지나갈 때마다 내 그림자가 길어졌다 짧아졌다 한다. 어릴 때는 이런 긴 그림자가 좋아서 가족들이랑 산책할 때마다 괜히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 그림자가 가장 긴 곳에 가서 서있곤 했다. 그림자가 짧을 땐 그것에 실망해서 괜히 일부러 제대로 안서있는 것인양 터덜터덜 걷다가 다시 내 키를 넘어 점점 더 길어지는 순간엔 오히려 더 길어보이려 몸을 펴곤 했다. 그림자처럼 내 스스로도 어느 순간 커보이기도 작아보이기도 한다. 앞으로 스스로가 작아보일 땐 움츠리지 말고 높은 가로등 바로 아래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해야지.


 다녀오는 내내 조그만 고민 몇 개만 붙잡고 있었다. 딱히 이런 고민들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이 나지도 않고, 사소하지만 고칠 수 없는 고민들이라 무엇을 더 해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체념하듯이 머릿속에서만 고민을 이리저리 튕기다가 돌아왔다.






법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사람은 합장을 했다. 


그는 한참을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이런 곳에서 말을 하면 꼭 이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조용함과 향내와 연기같은 모든 것들이 내 말과 나를 위해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분위기와 향초 연기가 말 소리에 소모되기라도 할 것처럼 사소한 것들은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가장 깊은 고민만 내밀하게, 여러번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회색 향초연기에 뒤섞여 말들이 모두 흩어질 때 즈음엔, 꼭 내 말을 누군가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그는 모종의 배신감을 느껴 한동안 그 법당을 찾지 않았다. 긴 시간이 지나고 그가 다시 찾아왔을 때, 그는 예전과 똑같은 곳에서 예전과 똑같이 합장을 했다. 그는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 너무 많은 말을 해서 이제는 향초에 더 태울 말이 남아있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배신감의 근원이 그가 소중히 빌었던 그 말들 속에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합장을 하고 법당을 나왔을 때, 그에게서는 향초타는 냄새가 났다.





지하철 역에서 우연히 올려다보았다가 천장이 예뻐서 찍어보았다. 




길에서 통닭파는 아저씨! 무지 맛있어보여서 멀리서 몰래 찍었다.




예뻤던 가게간판. 어떻게 빛그림자가 저렇게 갈라지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벌써 빼꼼 나온 크리스마스 장식들.




산에 무슨 불빛이 있길래 보니까 성곽이었다. 이쪽으로 성곽길이 이어져있나보다.




길상사를 돌아다니다 보니까 눈이 조금 쌓인 곳이 있어서 뿌듯했다. 눈온 날 눈도 못보고 가나 했는데...

아무도 안 밟은 자리 찾아서 손바닥을 찍어보았다! (왼쪽에 발바닥도 내거)




여기서 보이는 산등성이에는 이곳저곳 불빛이 많다. 길이 저기까지 이어져있는 건지 뭐가 저렇게 점점이 많은지 한번쯤 가보고 싶다.




겹친 기왓장들이 예뻐서!




돌에 대고 찍은 내 손 그림자!




밤이라서 ISO를 그냥 무지 높여놓고 찍었는데 어두운 곳들은 거의 보이지가 않아서 ISO를 좀 낮춰서 찍으니 세부가 좀 나왔다. ISO는 그냥 노이즈만 많이 생기는 줄 알았는데 밝기 대비가 심한 경우에도 쓰면 안될 것 같다. 다른 사진들도 ISO낮춰서 좀 열심히 찍을걸.




어릴 때는 이렇게 생긴 벽을 철조망같아서 무지 싫어했었는데, 요즘은 가끔 보면 예쁘다.




길 옆에 있던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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