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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비오는 날 버스에서

 비오는 날, 가로수들은 새로운 색과 향기를 내뿜었다. 공기 중엔 비냄새와 진한 풀냄새와 물안개가 합쳐져서 낯선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버스에 앉아 이 새로운 것들이 어떤 이국의 것인 양 쳐다보았다. 더 진한 초록빛, 더 짙은 보도블럭, 반짝이는 작은 웅덩이들. 일부러 낯선 거리에 있는 것처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무를 보고 지나가는 차를 보면서, 매일 지나가는 거리에서 낯선 감상에 빠져들었다. 이국적인 것은 감상을 일으키고, 감상하는 것에서 모든 것은 이국적으로 변했다.


 최근에 느끼게 된 것이지만, 냄새는 기억과 아주 잘 통한다. 하지만 김춘수의 시 "꽃"에 나오는 꽃처럼, 어떤 이야기없는 냄새는 그냥 좋은 냄새 혹은 나쁜 냄새로 지나가고 만다. 그렇지 않은 냄새들은 공기 속에 머문다기보다는 순식간에 콧속으로, 머리까지 들어와서는 여러 기억들을 끄집어낸다. 아니면 그 냄새 자체가 그런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옛날에는 싫어했던 가을의 은행 냄새도, 이제는 어떤 기억들과 함께 떠올라 냄새라기보다는 어떤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나는 비 냄새나는 기억들이 많다. 어릴 때 비 올 때면 누나들이랑 마당에서 우산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것과 거기서 어린 코로 맡던 새롭고 신기한 비 냄새. 그때의 비 냄새는 처음에는 흙바닥에 튀면서 흙 냄새를 품고, 나중에 마당을 시멘트로 덮어버렸을 때에는 바닥에 부딪혀 탁탁 차갑게 튀는 소리를 같이 품고 왔다. 그 다음은 제주도 올레길에서 맡았던 비 냄새. 둘이서 구릉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우리는 우산도 없이 급하게 걸었다. 걷다가 마침내 어떤 정자를 발견해서 거기서 비가 그칠 때까지 한참을 머물렀는데, 오가는 사람도 없고 정자에도 아무도 없어서 우리는 발을 말리면서 오랫동안 두런두런 이야기했다. 그때 했던 이야기들이 아직도 어떤 아쉬움들처럼 남아있다. 비오는 날 처마아래나 절이나 그런 물방울 떨어지는 곳에 있으면 항상 이 기억이 떠오른다. 가장 최근의 비냄새는 1월의 대만 여행에서 난다. 여행 기간 내내 비가 줄기차게 왔었는데, 특히 고양이 마을을 갔을 때가 제일 생생하다. 비가 분무기로 뿌리는 것처럼 와서, 비가 온 하늘에 흩날리는 모습이 꼭 하늘에 비로 된 커튼을 치는 것 같았다. 고양이들은 비를 피해서 전부 어디 숨어있었고 비 때문에 밖에 나와있는 사람도 거의 없어서 역사에 앉아 그렇게 비내리는 것만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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