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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표정

 어제 이상한 일이 있었다. 안경을 쓴 채로 친구를 만났는데, 안경을 낀 상태에서는 평소처럼 웃고 이야기하고 멀쩡히 있었다. 그러다 친구가 잠깐 안경을 벗어보라고 해서 벗었는데, 그러자마자 갑자기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가 무지 바보같았다. 앞이 덜 보인다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조차 모르다니.


 이후에 생각해본 바로는, 표정이 아주 관계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난 표정이 내가 마음대로 지을 수 있는, 소유하고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무언가를 향하지 않은 표정은 의미도 없고, 있지도 않은 것 아닐까? 생각해보면 무언가를 향하지 않은 표정은 아플 때 빼고는 별로 지어본 적이 없다. 표정의 진짜 의미는 항상 표정이 향하는 대상 속에 들어있었던 것 같다. 얘기하면서 웃을 때면, 내 표정은 상대방의 눈 속에서 이름지어진다. 그가 웃을 때 내 웃음은 즐거운 웃음이 되고, 그가 뾰루퉁해질 때는 짓궂은 웃음이 된다. 심지어 혼자 거울을 보고 미소지을 때도 그렇다. 그때의 미소는 날 위한 미소가 된다. 그럴 때는 내가 스스로 괜찮은 표정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결정한다.


 내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관계 속에서만 발현되는 무언가라고 생각하면 신기하다. 그러면 모든 사람에게 나는 각각 다른 표정을 지을까? 내가 어떤 사람에게 웃는 것처럼, 똑같이 다른 사람에게 웃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 걸까? 한편으로 생각하면 슬픈 점도 있다. 그러면 내가 내 모든 표정을 내보일 수 있는 사람도 있을까? 내가 내보인다기보다는, 그런 표정들을 다 올려놓을 수 있는 사람도 있을까? 하는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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