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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물기 꼬리물다가 시계가 된 동물가족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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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가는 길 아침엔 대단히 이상한 일이 있었고, 그것 때문인지 하루종일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간만에 길상사에 가기로 했다. 길상사에 가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옛날에 누가 처음으로 데려갔을 때 이후로 딱 한번 혼자 왔었는데, 그때부터 따지면 한 3년, 4년만에 가는 거려나. 출발하기 전에는 예전에 길상사에 갔었던 기억때문에 마음이 자꾸 착잡했는데, 막상 출발하고 나니 그만큼 착잡하진 않았다. 그냥 지하철에 타고 이런 저런 생각하면서, 마음 달래면서 있다보니 한성대 입구역에 도착했고, 거기서부터 길상사까지 걸어가는 것도 그렇게 오래걸리진 않았다. 가는 길에 해가 다 져버리면 어쩌나 꽤 걱정했었는데, 비가 와서 파란 빛은 없어도 다행히 구름 사이로 대충 흩어진 그런 햇빛들은 남아있었다. 걸어가는 길은 의외로 재미있었다. .. 더보기
비오는 날 버스에서 비오는 날, 가로수들은 새로운 색과 향기를 내뿜었다. 공기 중엔 비냄새와 진한 풀냄새와 물안개가 합쳐져서 낯선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버스에 앉아 이 새로운 것들이 어떤 이국의 것인 양 쳐다보았다. 더 진한 초록빛, 더 짙은 보도블럭, 반짝이는 작은 웅덩이들. 일부러 낯선 거리에 있는 것처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무를 보고 지나가는 차를 보면서, 매일 지나가는 거리에서 낯선 감상에 빠져들었다. 이국적인 것은 감상을 일으키고, 감상하는 것에서 모든 것은 이국적으로 변했다. 최근에 느끼게 된 것이지만, 냄새는 기억과 아주 잘 통한다. 하지만 김춘수의 시 "꽃"에 나오는 꽃처럼, 어떤 이야기없는 냄새는 그냥 좋은 냄새 혹은 나쁜 냄새로 지나가고 만다. 그렇지 않은 냄새들은 공기 속에 머문다기보다는 순식.. 더보기
기형도 - 노인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더보기
황지우 - 뼈아픈 후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신상(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 더보기
"Inglourious Basterds"를 보고 유쾌함으로 극복하는 역사의 비극. 유쾌해진다는 것은 얼핏 가벼워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유쾌함없이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비극 또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감싸주기도 한다. 졸레도 쇼샨나에게 결국 죽는 것에서 개인은 역사의 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보기
글쓰기와 못된 습관 글쓰기는 참 어렵다. 생각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탱탱볼 같아서 잡으려하면 이리 튀고 저리 튄다. 잡다보면 또 여기저기서 다른 생각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데 두더지잡기 게임같기도 하다. 마침내 생각 하나를 붙들어도 글이 자연스레 써지는 것은 아니다. 잡은 생각 사이로 중요한 뭔가가 미묘하게 보일듯 말듯한데, 그게 도무지 쉽게 글로 풀어지지가 않는다. 내 성격이 게으른 탓인지 그 생각 하나만 잡고 오래 있지를 못한다. 그래서 그냥 메모장에 적어두거나 나중에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떠오르면 써야지하면서 일단 넘겨버리는데, 이렇게 쓰지 않은 글도 세어보면 여럿되는 것 같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좀 더 떠오르면 써야지하고 미뤄두었다가 좀 구체적인 심상이 떠오르면 글을 쓰기 시작할 때가 많은데, 이렇게 써도 문제가.. 더보기
슬픔을 사는 은행 어느 날 마을에 슬픔을 사는 은행이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슬픔을 사는 은행이라니.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며 은행 문을 두드렸고, 은행은 실제로 저마다의 슬픔에 대한 값을 치르고 그것을 샀다. 은행에서는 더 깊은 슬픔일수록 더 큰 값을 지불했다. 그에 대한 이상한, 심지어 가끔은 보상없이도 치르고 싶어하는 댓가로 슬퍼하던 사람은 그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은행이 왜 갑자기 슬픔을 사는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은행은 슬픔을 샀고,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돈을 벌었다. 누군가가 은행에 슬픔을 팔아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은행이 슬픔을 사는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그는 하루종일 운다고 했다. 그는 슬픈 영화만 본다고 했다. 그는 일부.. 더보기
2016-06-29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더보기
그린 것들 자화상 영화 "클랜" 중에서 더보기
지하실에 버려진 피아노 "나중에 더 좋은 피아노 사줄게."수영이는 울먹였다. 이제껏 아껴오던 피아노를 버린다는 것이 너무 슬펐다. 수영이에게 이러한 상실은 어린 아이의 본능처럼, 소유적으로 이해됐다. 자신이 피아노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가 스스로 그 기억들을 모두 품고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피아노에 대해서 품었던 애정과 같은 감정들이 모두 그 안에 들어있어서, 피아노를 버리면 꼭 이러한 감정과 기억들까지 버리는 것 같았다. 자신이 피아노에게 내어줬던 것들이 모두 사라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피아노를 집 밖에 내어다놓은 며칠 동안, 수영이는 그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이상했다. 하지만 마침내 어느 수거업자가 그것을 가져갔을 때는, 오히려 피아노에 대해서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수거.. 더보기
안도현 - 스며드는 것들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더보기
심보선 - 청춘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며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 더보기
2016-02-19 회양목 그대에겐 아무것도 없어라.바람에 닳았는가, 빛나는 굳은 손도 아름답진 않고오래된 몸에서는 아무 향기조차 안 남았다.그대의 결실도 남들의 그것만큼 빛나지는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그 자리에 놓인 그대여.그럼에도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사랑받지 못하는 그대여.오직 단단함만으로 그 자리를 지켜내온 그대여. 더보기
2016-02-19 고요한 겨울 밤에 함께 길을 걷는 것은 신기하다.도란도란 서로 이야기나누며 걷다보면, 하얀 입김과 같이 나온 모든 단어들은 사라지지도 않고 그 공기 속에 맴돈다.말소리가 섞인 공기는 따뜻하다. 니가 그걸 알고 있던걸까, 아니면 내가 알고 있던걸까. 마치 찬 공기 데우려는 듯, 걷는 내내 분주히 말하던 우리. 더보기
2016-02-18 드디어 곧 개강이다!내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한 학기가 되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더보기
며칠간 그린 그림들 더보기
2016-02-01 사람은 사소한 것으로 예뻐진다. 찡그리는 눈 웃음이나, 톡 튀는 말 소리, 혹은 갸우뚱하는 고개처럼. 어떻게 그런 사소한 것들이 그렇게 예쁘게 보이는건지. 더보기
"미술관 옆 동물원" 을 보고 오래된 로맨스 더보기
2016-01-27 순간에 휩쓸려서 또 실수했다. 제발 앞으로는 그러지 않길. 조심히 생각하고 배려하면서 나아가자. 짧은 날들동안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자신감도 없고 조금 무기력하기도 했었는데, 나 이제는 전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해도 될까. 더보기
대만 여행 메모들_여기서 비는 무수한 남자 짧은 머리칼처럼 내린다 여기서 비는 무수한 남자 짧은 머리칼처럼 내린다. 7일째쯤에는 우산에 구멍이 뚫려서 우산을 들고 기울이는 방향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됐다. 대만 사람들은 눈이 예쁘다. 오밀조밀한 얼굴에 쌍꺼풀있는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여행오기 전에 인터넷으로 숙소에 개인세면도구가 있냐고 물어봤는데, 체크아웃 전날에 답장이 왔다. 나 다음 날에 나가는데... 더보기
대만 여행 메모들_집에 돌아가는 길 집에 돌아가는 길. 큰 아쉬움없이 돌아간다. 힘들었던 외곽 여행, 신났던 자전거 여행, 수많은 걸음들. 여행은 하나의 사건이 한 색으로, 여러 색깔 실들이 서로 뭉쳐진 실타래같다. 더보기
대만 여행 메모들_대만의 이미지 대만의 이미지. 초록색 슬레이트 지붕 낡은 건물 하루종일 들리는 빗소리 습한 공기 친절한 사람들 횡단보도 초록불에도 지나가는 차들 초록불이 되면 제일 먼저 출발하는 오토바이 무리 건물 아래있는 인도와 바깥 인도 인도의 건물 기둥들 길에서 나는 향신료 냄새 예쁜 아기들 10시쯤만 되어도 전부 문닫는 가게들 사람없는 밤거리 아기자기한 마을들 기차역과 선로 장막처럼 내리는 비 빗속의 고요함 대학 둘레 길의 큰 가로수들 오래되어 굵고 뒤틀린 가로수들 큰 도로 중앙선따라 심어져있는 야자수들 더보기
대만 여행 메모들_관계가 변해야할 때 그 기로위에서 관계가 변해야할 때 그 기로위에서. 갈팡질팡하는 게 제일 겁쟁이라고 생각하는데, 막상 내가 그 위에 설 때면 항상 갈팡질팡하는 것 같다. 한 발 내밀었다가 거두었다가, 혹은 내심 상대가 결정하길 바라고 있거나. 내 관계는 내가 결정할 수 있어야하는데. 더보기
대만 여행 메모들_낯선 사람 만나는 것에 익숙해졌다 낯선 사람 만나는 것에 익숙해졌다! 외국인이면 아직 좀 낯설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다니면 모든 일이 어느정도 즐거워보인다. 일상의 소소한 기쁨들도 눈에 잘 들어오고. 더보기
대만 여행 메모들_낯선 곳에 혼자 머무는 것 낯선 곳에 혼자 머무는 것. 자유로우면서 구속당하고 싶은 것. 시선에서 해방되는 것. 전부 혼자 결정해야하는 것. 핑계댈 곳이 없는 것. 방 공기가 차가운 것. 초라하게 행복한 것. 더보기
대만 여행 메모들_어느 골목의 파스타집 어느 골목의 파스타집. 창 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고 있으면 너무 편안하다. 유리에 막혀 들릴 듯 말 듯한 빗소리를 들으려고 하고, 처마에 맺힌 물방울을 보고 있으면 그냥 이것저것 생각난다. 언제까지 이렇게 편하게 있을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더 좋을텐데. 그 사람도 비를 보는 걸 좋아할까. 만약 좋아한다면, 아무 말 없이 서로 기대서 같이 보고 있고 싶다. 골목은 예쁘다. 들어가면 꼭 뭔가 있을 것 같고, 들어서는 순간 둘러싼 좁은 담장들이 완전히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오직 몇 명만이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공간.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림 그릴 수 있을까? 그림을 보면 꼭 그 안에 들어와있는 것 같은. 예쁜 장면들은 볼 때마다 꼭 그려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눈으로.. 더보기
대만 여행 메모들_강변 들강아지들 강변 들강아지들 강변 길따라서 자전거타고 가는데, 저 멀리 강아지 무리가 보여서 자전거를 세웠다. 세우니까 한 마리가 고개를 들더니 이쪽을 본다. 조금 있으니까 옆에 애들도 다 이쪽을 보고는, 한 마리가 짖으니까 전부 따라짖기 시작했다. 왈왈왈왈왈왈! 들강아지들인데다가 몸집도 커서 조금 무서운 마음에 다시 자전거타고 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따라오던 중국인 아저씨가 허허허 웃는다. 진짜 한참 허허허 웃으시고는 중국말로 뭐라뭐라하시고 가셨는데, 중국말은 알아듣질 못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웃음소리 들으니 강아지들도 갑자기 귀여워보이고 기분이 좋아져서 나도 따라서 허허허 웃었다. 다시 타고 가는 길에는 왠지 모르게 계속 한번씩 웃음이 났다. 그 뒤로 이렇게 무리지은 것은 아니지만 들강아지가 이곳저곳에 있는 .. 더보기
대만 여행 메모들_검은 털난 늙은 개와 할아버지 검은 털난 늙은 개와 할아버지 늙은 개가 문밖에 나와 비구경을 하고있으니, 할아버지가 문턱에 서서 개를 기다리고 있다. 개가 다시 들어오니 할아버지도 따라 조그만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더보기